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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10월01일 18시42분 26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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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는 어떻게 자신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넣었는가
 
 세가 코퍼레이션 오카와 이사오(大川功, 1925~2001) 회장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세가의 꿈을 안고 1998드림캐스트가 출항했다. ‘드림캐스트를 위해 세가는 유카와 히데카즈(湯川英一, 1943~) 전무를 앞세워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벌였다. 초반 판매량을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 할 정도로 좋은 출발이었다. 지난 15년 동안 세가가 꿈꾸어 온 가정용 게임기 시장 장악이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두 일장춘몽이었다. 2000년 봄 출시 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는 드림캐스트의 목을 사정없이 조여오고 있었다. ‘세가 새턴시절처럼 가격인하 경쟁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드림캐스트는 한 대 팔 때 마다 세가가 손해를 입어야 했다. 전용 부품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었고, 원가 절감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드림캐스트는 꿈과 희망은 고사하고 물이 차오르는 난파선이 되어 있었다.
 
동서양이 만난 게임회사, 세가
게임회사 세가의 기원을 따져보면 1940년 마틴 브롬리(Martin Bromley)가 설립한 스탠다드 게임즈(Standard Game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사는 미군 기지에 있는 슬롯머신, 쥬크박스 등의 관리를 하는 회사였다. 스탠다드 게임즈는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주일미군기지의 슬롯머신 사업에도 진출했다.
 
1950년대 초, 미 정부가 슬롯머신을 불법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스탠다드 게임즈는 아직 슬롯머신 사업이 합법인 일본으로 회사의 본거지를 옮겼다. 이제 이 회사는 서비스 게임즈(Service Games)’가 되었다. 서비스 게임즈는 일본 내 미군기지 및 민간에 슬롯머신 기기를 팔고 관리하는 사업을 벌였다.
 
한편 1954년 미 공군 장교 데비이드 로젠(David Rosen, 1930~)은 전역 후 즉석 사진 사업을 시작하며 로젠 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를 세웠다. 로젠은 제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모두 참전했으며, 한국전쟁 직후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 역시 슬롯머신과 핀 볼 게임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다.
 
1965, 서비스 게임즈와 로젠 엔터프라이즈는 합병을 결의했다. 새로운 회사의 이름은 서비스 게임즈(SErvice GAmes)에서 네 글자를 따온 ‘SEGA’와 로젠 엔터프라이즈에서 엔터프라이즈를 따온 세가 엔터프라이즈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가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데이비드 로젠은 세가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1966년 세가는 첫 게임인 페리스코프(Periscope)’를 내놓으며 아케이드 산업에 진출했다. 잠수함을 테마로 한 슈팅 게임인 페리스코프는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가는 이 페리스코프를 미국에도 수출하며 호평을 받았다. 세가는 일본과 미국을 모두 공략하는 글로벌 게임 기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걸프 앤 웨스턴사가 세가를 인수해 자회사로 두었다.
 
 
데이비드 로젠의 지휘 하에 세가는 성장을 거듭했다. 1970년대 아케이드 게임은 호황의 절정에 있었고, 일본에서는 오락실 때문에 동전 부족 사태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이 시절 세가는 벅로저스등 시대를 앞서가는 아케이드 게임을 내놓으며 잘 나가던 회사였다.
 
세가는 독특한 게임회사였다. 모기업은 미국 회사인 걸프 앤 웨스턴이었고, CEO는 미국인 데이비드 로젠이었다. 세가의 중추를 담당하는 개발진은 일본인이었으며, 아케이드 사업은 일본과 북미를 아우르고 있었다. 일본과 미국, 동양과 서양이 한 데 만난 진짜 글로벌 게임회사였다. 세가는 연일 승승장구했다. 1979년에 이르면 세가의 연 매출은 1억달러에 달했다.
 
1983715일 금요일, 운명의 날
1982, 세가는 매출 2억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세가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1980년대 초 일본 아케이드 시장은 위축되고 있었다. 데이비드 로젠 등 세가 경영진은 아케이드 시장만으로는 세가의 미래가 어둡다는 판단을 내리고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북미에서는 아타리와 마텔, 콜레코비전 등 여러 게임회사가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으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세가는 아케이드 게임 노하우를 살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선배(?)인 아타리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북미 시장에서 1200만대의 게임기를 팔아 치우며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 비슷한 결정을 내린 일본 게임 회사가 또 있었다. 바로 닌텐도였다. 닌텐도는 70년대 말부터 요코이 군페이(横井軍平, 1941~1997)가 지휘하는 개발정보부를 만들어 가정용 게임기 시장의 공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닌텐도는 1980년 휴대용 게임기 게임앤워치(Game&Watch)’를 내놓으며 성공을 거두었고, 1980년대 초반 발매를 목표로 가정용 게임기 패미컴을 개발하고 있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이 새로운 수입원이 될 것이라는 세가 데이비드 로젠의 판단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예상이었다. 1981년 말부터 북미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는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타리를 비롯해 각 회사가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놓고 벌이던 경쟁은 과열 양상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북미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는 말 그대로 너 나 할 것 없이 게임을 찍어내 팔고 있었다. 식품회사, 음반회사 등 일단 어깨에 힘 좀 있는 회사라면 다들 게임을 내놓았다. 게임 품질 관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돌아가면 게임이다라는 식의 저질 게임이 시장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2년 크리스마스 저 유명한 ‘E.T.’를 기점으로 북미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1983년이 되어도 아타리, 마텔, 콜레코비전 등 거의 모든 게임 회사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빠른 자살을 위해 자기 머리에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것이 아타리 쇼크. 이 와중에 닌텐도와 세가가 과연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는다고 성공할지는 미지수였다.
이 둘은 난장판이 된 북미 시장은 잠시 접어두고, 일본 시장에 일단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닌텐도와 세가는 동일한 날 일본에 각각 패미컴‘SG-1000’을 내놓으며 앞으로 10년 넘게 이어갈 악연의 문을 열었다. 운명의 그 날은 1983715, 금요일이었다.
 
패배로 출발한 세가의 가정용 게임기 사업
닌텐도의 패미컴과 정면 대결을 선택한 세가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타리시리즈를 그대로 답습한 낡은 컨트롤러에, 별 특징이 없는 하드웨어 구성을 하고 있는 ‘SG-1000’이 잘 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SG-1000’은 말 그대로 너덜너덜하게 참패했다.
 
닌텐도의 패미컴은 궤도에 오르고 있는 마당에, 세가는 차세대 사업이라고 진출한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처음부터 굴욕을 겪었다. 한 때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던 게임 산업은, '아타리 쇼크'를 겪으며 입지가 시궁창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세가의 매출액도 19822억달러에서 이듬해에는 13천만 달러로 추락했다.
 
모회사인 걸프 앤 웨스턴은 세가를 분할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에 있던 세가 엔터프라이즈의 지분은 핀 볼 기계를 만들던 발리 매뉴팩처링(Bally Manufacturing)사에 매각했다. 일본에 있는 세가 엔터프라이즈의 지분은 세가 창립자 겸 CEO 데이비드 로젠에게 3800만달러를 제시하며 인수를 권했다.
 
비록 게임산업이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데이비드 로젠은 게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걸프 앤 웨스턴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3800만 달러는 혼자 감당하긴 너무 많은 액수였다. 로젠은 이 당시 세가에서 아케이드 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나카야마 하야오(中山隼雄, 1932~)와 함께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했다. 데이비드 로젠의 친구 오카와 이사오가 회장으로 있던 ‘CSK 홀딩스가 투자자로 나섰다.
 
세가 엔터프라이즈는 이제 CSK 홀딩스 산하의 일본 회사가 되었다. 나카야마 하야오는 세가의 새로운 CEO가 되었고, 데이비드 로젠은 세가의 북미 사업 총괄을 맡았다. 발리 매뉴팩처링에 매각했던 지분도 다시 매입했다. 회사의 분할 매각과 SG-1000의 참패로 세가는 일시적인 위기를 맞았지만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세가는 이 정도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닌텐도를 꼭 꺾을 수 있으리라.
 
세가 마스터 시스템, 절반의 성공
1985년은 아케이드 게임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해다. 그 해 세가의 천재 개발자 스즈키 유(鈴木裕, 1958~)가 오토바이 레이싱 게임 행 온(Hang-on)’을 내놓으며 큰 충격을 주었다.
 
오토바이처럼 생긴 컨트롤러 위에 올라타 컨트롤러와 연동되어 움직이는 화면을 보며 게임을 한다는 발상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신선한 컨셉이었다. ‘행 온의 성공과 더불어 세가는 다시 한 번 아케이드 게임에서 최첨단 기술을 선도하는 업체로 명성을 날렸다.
 
세가는 아케이드 게임 열풍을 가정용 게임기로 이어가고 싶었다. 1985년 가을, 세가는 SG-1000을 개량한 ‘SG-1000 마크 3’을 일본 시장에 내놓았다. 이 마크3 역시 일본 시장에서는 참패를 거듭했다. 게임기만 덩그러니 나오고 주목 할 만 한 타이틀이 거의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닌텐도의 패미컴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세가의 노림수는 북미 시장에 있었다. 세가는 이 마크3’을 다시 한 번 개량해 1986세가 마스터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북미에 출시했다. 대작의 부재로 참패를 겪은 일본 시장에서의 경험을 의식해 행 온스페이스 해리어등 세가가 보유한 아케이드 게임을 아낌없이 이식해서 내놓았다. 세가 아케이드 게임의 이식은 괜찮은 성과를 거뒀다.
 
천재 개발자 스즈키 유가 이끄는 AM2 팀은 '행 온' 이후에도 대박을 이어나갔다. AM2팀은 아웃런(1986)’, ‘애프터 버너 2(1987)’등 혁신적인 아케이드 게임을 잇달아 내놓고 있었고, 이들 아케이드 게임의 이식 및 발매는 세가 마스터 시스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세가 마스터 시스템은 북미와 일본에서는 여전히 닌텐도의 패미컴에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유럽과 남미에서는 닌텐도의 공백을 틈타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시기 한국에서도 삼성전자가 삼성 겜보이라는 이름으로 마스터 시스템을 정식 발매했다. 삼성전자는 알렉스 키드같은 인기 게임을 한국어로 바꿔 발매했을 정도로 삼성 겜보이의 보급에 공을 들였다.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판매 부진으로 출시 되지 않은 세가 마스터 시스템 개량판을 삼성전자가 한국에 정식 발매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가 마스터 시스템 자체는 닌텐도의 패미컴에 또 한 번 패배했다. 브라질에서는 500만대가 팔려나가는 '기적'이 있었지만 패미컴의 아성에 도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남미와 유럽에서의 성공, 그리고 아케이드 게임의 이식과 흥행은 세가에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지 큰 교훈이 되었다. 세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닌텐도의 턱 밑에 비수를 들이댄다.
 
닌텐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메가드라이브소닉
세가는 1988년 세계 최초의 16비트 게임기 메가드라이브를 선보였다. 메가드라이브는 당시 최첨단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을 가정용 게임기로 옮기기 위한 시도였다. 아예 게임기 자체가 세가의 16비트 아케이드 기판인 시스템 16’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세가는 자사의 강력한 아케이드 게임을 가정용 게임기로 옮기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세가는 이번에도 일본 시장에서 또 닌텐도에게 물을 먹었다. 세가 메가드라이브는 198810월 말에 발매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메가드라이브 발매 며칠 전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이 발매되었다. 전 일본이 슈퍼 마리오에 열광했고, 세가의 메가드라이브는 초반 인기몰이에 실패했다.
 
일본에서 물을 먹었지만, 세가는 북미 시장에서 회심의 일격을 노리고 있었다. 나카야마 하야오는 매 회의 마다 세가 임원들에게 백 만 대!’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 메가드라이브를 백 만 대 팔고 오라는 뜻이었다. 그 기세를 몰아 1989년 여름 북미에서 세가 제네시스(Sega Genesis)’라는 이름으로 메가드라이브가 출시되었다.
 
세가는 북미에서의 성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북미 게이머에게 통할 게임이 필요했다. 북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미식축구였고, 세가는 이 점을 노렸다. 세가는 EA와 협력해 제네시스 독점 미식축구 게임을 출시했다. 북미에서 세가는 매우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아예 대놓고 닌텐도를 <Genesis does what Nintendon't>라고 비꼬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또한 닌텐도의 마리오에 대적할 마스코트 겸 킬러 타이틀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세가 AM8 팀에서 아이디어를 냈고 고슴도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푸른 고슴도치 소닉의 시작이다. 발매 첫 해 50만대로 시작한 제네시스의 북미 판매량은 1991소닉 더 헤지혹(Sonic the Hedgehog)’의 등장과 함께 드디어 불이 붙기 시작했다.
 
1990년 닌텐도가 슈퍼 패미컴을 내놓으며 뒤늦게 16비트 게임기 전쟁에 돌입했지만, 지금은 최고의 명기로 불리는 슈퍼 패미컴도 북미 시장에서는 세가 메가드라이브에 밀려 고전했다. ‘소닉 더 헤지혹1500만장 이상을 팔아 치우며 메가드라이브의 선전에 크게 공헌했다. 닌텐도하면 마리오가 떠오르듯, 고슴도치 소닉은 세가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메가드라이브의 선전으로 세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볕이 들고 있었다. 특히 북미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세가는 1994년 말까지 1400만대 이상의 제네시스를 북미에서 팔았다. 적어도 이 시기만큼은 북미에서 세가가 닌텐도를 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 만 대!’를 외치라고 하던 나카야마 하야오 세가 CEO는 자신의 구호 그 이상을 북미에서 거둬들였다.
 
총체적 난국의 시작
세가가 북미에서 메가드라이브로 거둔 성공은 장기적으로 독이 되었다. 북미에서 거둔 성공에는 크게 두 가지 불안 요소가 잠재해 있었다. 하나는 일본 시장에서는 메가드라이브가 참패했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세가가 이 메가드라이브의 성공에 취해 갈팡질팡하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세가는 메가드라이브의 성공에 취해 본격적으로 스스로의 머리에 러시안 룰렛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실 징조는 메가드라이브 초기부터 있었다. 메가드라이브 개발 당시 세가는 세가 마스터 시스템과의 하위 호환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했다.
 
아타리가 시도했다가 망한 이래 하위호환은 가정용 게임기에서 '금기어'였는데, 세가는 메가드라이브 개발 과정에서 하위호환을 빼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물은 메가드라이브에 따로 달아야 하는 추한 어댑터였다. 다행히 세가가 아직까지는 제정신이었고, 이 어댑터는 잊혀졌다.
 
그런데 메가드라이브가 성공을 거두자 세가의 못된 버릇(?)이 또 두각을 드러냈다. CD-ROM시대가 다가오자 세가는 메가드라이브용 CD롬 어댑터를 내놓기로 결정했다. ‘세가 CD’로 이름 붙은 이 기기는 간단히 말해 메가드라이브 위에 꽂아야 하는 추한 어댑터였다. ‘세가 CD’는 몇 개 안 되는 타이틀을 내고 망해버렸다.
 
이어 3DO와 아타리 재규어 등 차세대게임기의 등장을 본 (참고로 이들은거침없이 망했다.) 세가는 제네시스 2’라는 이름의 주변기기를 또 내놓으려 들었다. 다른 게임기와 특히 닌텐도의 슈퍼 패미컴을 견제하기 위해 메가드라이브의 그래픽 성능을 아주 약간 강화하는 부품이었다. 한 마디로 약간의 시간을 벌려는 고기방패였다. 이 고기방패의 개발에 세가는 꽤 진지하게 임했다.
 
이 고기방패를 놓고 세가 아메리카와 세가 본사 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다른 32비트 게임기를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세가 32X’가 되었다. 결과물은 당연히 메가드라이브 위에 꽂는 추한 어댑터였다. 이제 메가드라이브는 3층 석탑이 되었다. 메가드라이브에 세가 CD와 세가 32X를 모두 장착한 후 전원 3개를 각각 연결해야 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메가드라이브, 세가 CD, 세가 32X를 하나로 합체한 세가 넵튠이라는 프로젝트도 있었다. 세가는 32비트 게임기라는 '세가 새턴'을 개발하며 이런 멍청한 짓을 거듭하고 있었다. 북미 시장에서 잘 나가던 메가드라이브의 생명을 어떻게든 연장해 보려는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가 넵튠' 프로젝트는 돈만 날리고 개발이 취소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에 있는 세가 사령탑과, 성공을 거두고 있는 세가 아메리카의 방향이 점점 엇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서 설명한대로 메가드라이브는 일본에서는 실패한 게임기였고, 북미에서는 성공한 게임기였다. 이 차이가 서로의 갈등을 낳았다.
 
이 불화의 시작 중 하나는 32비트 게임기 세가 새턴의 황당한 등장이었다. 90년대 초, 세가 아메리카 임원들은 일본에서 막 날아온 따끈따끈 한 세가 새턴의 시제품을 보고 경악했다. 투박하고 멍청해 보이는 겉모습은 둘째치고, CPU2개에 비디오 프로세서가 2개였다!
세가 아메리카의 고위 임원들은 황당해 했다. 이런 구조의 게임기로 무슨 게임 개발을 한단 말인가? 이전까지 세가 아메리카는 게임기 개발 만큼은 철저히 본사의 방침을 따랐지만, 이번만큼은 사태가 심각했다. 그들은 행동에 나섰다.
 
세가 아메리카는 당시 그래픽 업계의 큰 손이던 '실리콘 그래픽스'에 게임기에 넣을만한 단순하면서도 괜찮은 칩셋이 없느냐고 문의했다. 마침 실리콘 그래픽스도 게임기 산업에 관심이 있어 기웃거리던 참이었고, 적당한 성능을 가진 칩셋을 하나 찾아냈다. 그러나 세가 본사에서는 양키들이 찾아낸칩셋이 이런 저런 문제가 있다며 거부했다.
 
세가에게 퇴짜를 맞은 실리콘 그래픽스는 칩셋을 들고 다른 회사에 찾아갔다. 그 회사의 이름은 닌텐도 아메리카였고, 이 칩셋은 닌텐도64’에 들어가게 된다. 세가가 자신의 머리통에 날린 '두 번째' 총알이었다. 서로 불협화음을 내는 칩셋 한 무더기 대신 단일 칩셋으로 비용도, 개발 편의성에서도 이득을 거둘 수 있는 기회였는데 스스로 날려버렸다.
 
두 번째 치명적인 패배
세가가 가정용 게임기 개발로 열심히 자살 시도를 하는 동안에도, 아케이드 시장에서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천재 개발자 스즈키 유와 그가 이끄는 AM2 팀은 또 한 번 아케이드 시장을 뒤집어 놓았다. 이번에는 3D 였다. 레이싱 게임 버추어 레이싱(Virtua Racing, 1992)’3D 게임 시대를 연 스즈키 유는, 19933D 격투 게임 버추어 파이터(Virtua Fighter)’을 내놓으며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버추어 파이터를 보고 많은 게임 회사들이 3D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제 대세는 3DCD-ROM이었다. 그러나 이 신기술 열풍에는 이면이 있었다. 많은 게임 회사가 3DCD-ROM 때문에 주화입마에 빠져 고통을 겪었다.
 
이 시기 멀쩡히 2D로 개발되던 게임을 3D로 만들기 위해 프로젝트를 엎는 일은 흔했다. 그렇게 엎은 프로젝트는 대부분 무사하지 못했고 때로는 회사의 생존까지 위협했다. 놀랍게도 주화입마에 빠진 게임 회사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세가 자신이었다.
 
앞서 세가 아메리카에 보내졌던 '세가 새턴'은 왜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채택했을까? 새로 등장한 경쟁자인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3D를 지원하는 차세대 게임기라고 설쳤다. 소니의 말에 콧방귀만 뀌던 게임 개발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가의 버추어 파이터를 보고 3D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너도 나도 3D 게임 개발에 나섰다.
 
세가 입장에서 곧 내놓을 차세대 게임기는 '플레이스테이션' 만큼의 3D는 보여줘야 했고, 부랴부랴 새로운 칩셋이 추가되었다. 명색이 세가가 내놓는 차세대 게임기인데 '버추어 파이터'의 맛깔나는 3D 정도는 기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원래 닌텐도의 '슈퍼 패미컴'을 겨냥하고 설계된 '세가 새턴'에 갑자기 3D 기능을 강화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그 대가로 세가 새턴은 불협화음을 내는 칩셋 한 무더기가 탑재된 복잡한 구조가 되었다. 새턴 게임 개발은 난감한 수준이 되었고, 덤으로 원가도 올라갔다. 이게 바로 세가가 자신의 머리에 날린 '첫 번째' 총알이었다.
 
1994년 가을, ‘세가 새턴과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 약 한 달의 간격을 두고 잇달아 일본에서 출시되었다. 세가 새턴은 초반 그럭저럭 괜찮은 판매량을 거뒀다. 초기 물량 20만대는 금새 매진되었다. 세가는 메가드라이브로 성공을 거둔 북미 시장에 빠르게 진출하고 싶었다. 1995년 봄,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게임쇼 E3에서 세가는 폭탄 선언을 했다. “지금 바로 세가 새턴을 북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세가는 여기에서도 물을 먹었다. 세가에 이어 소니 북미 책임자인 스티브 레이스가 한 마디를 던지자 이목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집중되었다. 그가 던진 말은 간단했다. “299달러!” 세가보다 조금 늦게 출시하지만, 399달러인 세가 새턴보다 플레이스테이션이 100달러 싸다는 장점을 어필한 것이다.
 
그래도 세가 새턴은 나름 선전했다. 세가는 북미에 5천만달러 규모의 마케팅을 실시하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일본과 북미 양쪽에서 팬저 드라군시리즈나 샤이닝 포스같은 명작을 앞세우며 바람몰이에 나섰다. ‘사쿠라 대전처럼 일본 게이머의 취향에 맞는 명작 게임도 나왔다. 세가 새턴에 충성하는 게이머도 하나 둘 생겼다.
 
세가의 마케팅이 어쨌든 북미 게이머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그래서 세가 새턴으로 소닉 언제 나오나요?” 모두가 묻고 있었다. "다음 달에는 세가 새턴으로 소닉이 나오겠죠?"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소닉은 세가 새턴 기종으로는 영원히 나오지 못했다. 세가 새턴용 소닉 프로젝트는 시간을 끌다가 취소되었다.
 
세가와 소니는 서로의 목을 따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롬 카트리지만 붙잡고 있다가 순식간에 뒷방 퇴물이 되어버린 닌텐도는 애초에 이 승부에 끼지도 못했다. 세가와 소니는 자비 없는 가격 인하 경쟁을 벌였고, 온갖 수단으로 서로의 서드파티를 빼내왔다.
 
결과는 소니의 대승리였다. 세가 새턴의 복잡한 구조는 게임 개발자에게 매우 짜증나는 요소였다. 이론적으로야 세가 새턴이 플레이스테이션과 맞먹거나 그 이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그걸 제대로 구현해 낸 게임 개발자는 별로 없었다. 세가 새턴은 점점 '2D에 강한 게임기'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고, 플레이스테이션의 3D 게임에 비하면 좀 낡아보였다.
 
소니와 가격경쟁까지 벌이면서 세가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말기에 가면 세가는 새턴 한 대를 팔 때 마다 역으로 손해를 입고 있었다. 여러 칩셋을 더덕더덕 붙여놓은 세가 새턴의 구조 때문에 원가 절감도 불가능했다. 이 자살행위를 막아야 했지만 다들 독재자 나카야마 하야오가 두려워 감히 진언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크게 외쳐야 했고, 세가 아메리카의 수장이었던 버나드 스톨러가 이 역할을 맡았다. 1997E3에서 버나드 스톨러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새턴은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 세가 새턴은 끝장났고, 세가는 소니와의 진검승부에서 무릎을 꿇었다.
 
세가의 꿈을 담은 드림캐스트의 출항과 난파
그렇게 세가 새턴을 죽여버린 세가는, 차세대 게임기의 출시를 서둘렀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더 진보한 게임기를 선보인다면 게임기 시장을 선점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기기는 세가 아메리카와 일본 세가 양 쪽에서 모두 시제품을 만든 다음 최종안을 선택하기로 했다. 실리콘 그래픽스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세가는 새로운 동맹군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끌어들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난 기사인 스티브 잡스가 전화통 붙잡고 MS에 소리 지른 이유는를 참고하라) 하지만 옛 동맹군인 EA를 끌어들이는데 실패했다. EA는 미래가 불확실한 세가 드림캐스트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 생각이 없었다. EA는 끝까지 드림캐스트플레이스테이션2’ 사이를 저울질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드림캐스트는 말 그대로 세가의 꿈을 담은 게임기였다. 이번에는 일부러 드림캐스트와 호환되는 아케이드 게임 시스템을 준비해 왔을 정도로 세가는 치밀했다. 가정용 게임기 중에서는 최초로 모뎀을 기본 장착한 기기이기도 했다. (반다이와 애플의 피핀이라는 게임기가 시기로만 보면 좀 더 이르지만, 피핀의 운명에 대해서는 지난 기사를 참고하시길!)
 
199811, ‘드림캐스트는 화려하게 출발했다. 초도 물량은 금방 매진되었고, 유카와 전무를 앞세운 세가의 광고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꼬마가 세가 게임기 구려. 플레이스테이션이나 하러 갈래.”라고 말하는 장면이 섞여 있던 세가의 자학적인 광고는 일본 사회에서 연일 화제였다. 흔한 노땅 샐러리맨이었던 유카와 전무는 파격적인 '드림캐스트' 광고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듬해인 199999일에는 미국에서 드림캐스트가 출항했다. 세가는 북미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일부러 ‘9/9/99’를 맞춘 출시 날짜도, 남코의 소울칼리버와 세가의 소닉 어드벤처를 포함한 동시 발매 타이틀도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플레이스테이션2’가 등장하기 전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세가의 꿈은 드림캐스트로 현실이 되는 듯 했다.
 
화려하게 출발한 드림캐스트는 곧 수렁에 빠졌다. 소니는 드림캐스트의 발목을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SCE 사장으로 승진한 쿠타라기 켄이 기꺼이 악역을 맡았다. 그가 이 시기 플레이스테이션2’를 띄우기 위해 내놓은 발언은 지금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PS2는 슈퍼컴퓨터에 버금가는 연산을 자랑한다.” “PS2에 탑재된 이모션 엔진은 지금까지 보여줬던 어떤 그래픽도 능가할 강력한 엔진이다.” 등등.
 
쿠타라기 켄이 늘어놓은 발언 중 드림캐스트에 쐐기를 박은 치명적인 발언은 “PS2PS1게임을 구동할 수 있다.”“PS2는 훌륭한 DVD 플레이어다.” 이 두 가지였다. 언제 나올지는 아직 모르지만 플레이스테이션2’는 하여간 이런 기능을 갖추고 있으니 드림캐스트를 사지 말고 기다리라는 식이었다. 이런 짓은 닌텐도가 패미컴, 슈퍼 패미컴 시절에 즐겨 하던 언론 플레이였다.
 
초반의 생산 차질도 있었고 (이번에도 또 전용 부품이 발목을 잡았다), ‘드림캐스트의 판매량은 점차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북미 시장에서 99년 연말까지 150만대의 판매량을 기록한 이후, 드림캐스트는 기울기 시작했다. 일본 시장에서는 더욱 고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03월에 드디어 소니 플레이스테이션2’가 등장하며 드림캐스트는 파멸했다.
 
세가가 불법복제는 불가능하다고 호언장담했던 '드림캐스트' GD-ROM 시스템도 MIL-CD의 보안 결함을 이용한 부팅시디가 등장하며 뚫렸다. 거액을 들인 쉔무같은 게임도 불법복제로 돌기 시작했다. 세가는 신형 드림캐스트99달러까지 인하하는 파격적인 정책까지 내놓았지만 당연히(?) MIL-CD 기능이 제거 된 신형 드림캐스트는 인기가 없었다.
 
드림캐스트 파멸의 한 원인은 세가 새턴이 그랬던 것처럼, 원가 절감이 거의 불가능 한 게임기 부품에 있었다. GD-ROM부터가 그랬다. 불법복제 방지를 위해 독자 규격인 GD-ROM을 탑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2’DVD-ROM에 비하면 용량도 1/4 수준이었고 원가 절감도 불가능했다. GD-ROM을 사용하는 다른 기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가의 꿈을 담고 출항한 '드림캐스트'가 휘청이며 세가도 같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나카야마 하야오 사장은 아케이드 사업부 총괄로 강등되며 오랜 독재의 막을 내렸다. 이리지마리 소이치로 부사장이 세가를 총지휘하기 시작했다.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CSK 홀딩스의 오카와 이사오 회장이 직접 세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끝났다. 나카야마 하야오는 회사를 떠났고, 이제 오카와 이사오 회장은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세가가 18년 동안 꾼 오랜 꿈의 끝
오카와 이사오 회장은 가라앉는 드림캐스트와 세가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고군분투했다. 회사에 사재를 털어 넣어 자금지원을 하기도 했고, 옛 동맹군인 마이크로소프트를 찾아 빌 게이츠에게 드림캐스트를 살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오카와 회장은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하던 신형 게임기(후에 엑스박스가 되는)에 드림캐스트 호환 기능을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세가는 그 대가로 마이크로소프트에 자사가 보유한 몇몇 게임의 지적재산권을 넘기는 조건이었다. 이 이야기는 거의 성사될 뻔 했지만 인터넷 서비스를 둘러싼 입장차이로 결국 결렬되었다. 드림캐스트는 이제 희망이 없었다.
 
20011, 오카와 이사오 회장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세가는 2001331일부로 드림캐스트의 생산을 중단하고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철수한다. 세가는 앞으로 소프트웨어 유통에 주력한다.” 공교롭게도 드림캐스트의 생산 중단을 불과 2주일 앞두고 오카와 이사오 세가 회장은 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1316일의 일이었다.
 
꿈은 끝났다. ‘드림캐스트의 파멸은 세가에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많은 세가 직원이 구조조정으로 정든 회사를 떠나야 했다. ‘드림캐스트쉔무를 만들었던 슈퍼스타 스즈키 유는 자회사로 좌천당했다. 세가가 쉔무에 퍼부은 돈만 70억엔에 달했지만 이 개발비는 대부분 허공으로 사라졌다. 세가를 영광의 반석에 올려놓은 천재 개발자는 이제 회사를 말아먹은 역적이 되었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 세가는 그나마 오카와 이사오 회장이 남긴 유산으로 버틸 수 있었다. 오카와 회장은 죽기 직전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주식을 포함해 총 1300억엔 이상(1조원 이상)의 자산을 세가에 남겼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세가 경영에 실패했다고 자책하며 막대한 재산까지 내놓은 채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세상을 떴다.
 
CSK 내에서 세가는 골칫덩이가 된 지 오래였다. 오카와 이사오 회장 생전에는 CSK 창립자인 오카와가 자신의 권위로 세가를 보호해 주었지만, 그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세가는 한동안 자신들을 사 줄회사를 찾아 떠돌아야 했다. 닌텐도, 남코, 반다이, 일렉트로닉 아츠, 마이크로소프트까지. 어지간한 회사들은 전부 세가를 인수해 줄후보 물망에 올랐다.
 
결국 2003년 세가를 인수해 준 것은 일본 최대의 빠찡코 생산 업체였던 사미였다. CSK는 즉시 세가 매각을 결정했고, 세가는 사미와 합병해 세가-사미 홀딩스가 되었다. 다행히 합병 이후 세가는 흑자로 전환했고, 지금까지 게임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세가는 게임기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 북미에서 메가드라이브로 거둔 작은 성공을 제외하면, 경쟁자와의 대결에서 언제나 막대한 피를 흘리며 패했다. 닌텐도의 벽은 너무나 높았고, 신흥 강자 소니는 세가의 게임기를 무참히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가격 인하와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이며 세가는 엄청난 돈을 허공에 뿌려야 했다.
 
세가는 중요한 시점에 잇달아 바보 같은 결정을 하며 자신의 머리에 대고 러시안 룰렛을 돌리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서 이제 그만!’이라고 외쳐야 했지만,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총알이 단 한 발 든 리볼버라도 여섯 번이나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 한 발이 세가를 파멸시킬 뻔 했다. 혼수상태에서 겨우 살아난 세가는 이제 가정용 게임기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 자료출처: 게임어바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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